[편집자주]고광률은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이다. 1990년 엔솔로지(아버지의 나라』 실천문학)에 통증으로 등단 이후장편소설 오래된 뿔(은행나무등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잡지사 정치 관련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를 지냈고대중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문예창작 및 미디어 관련 출강을 하고 있다.

정치인의 뒷배는 권력이 아니라 민심

외눈박이들이 사는 나라에 두 눈 가진 사람이 오면 병신이 왔다면서 구경을 한다고 한다. 외눈박이들끼리만 살아왔기에, 두 눈을 본 적이 없고, 그러니 외눈이 정상이고 두 눈은 비정상인 것이다. 또 두 눈이 정상인 줄 안다해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병신이 되니까. 아마도 전직 대통령이 ‘혼이 비정상’ 어쩌고 떠든 것도 이런 맥락과 기준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폐는 물론이요, 개혁 관련 정책안이 아니더라도 뭐만 나왔다하면 야당, 특히 의석수로 제1 야당이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의 반응이 거칠고 반발이 거세다. 말은 상식·이치·도리 수준을 한참 벗어나 폭력 수준이다. 정치인으로서 국민을 위한 자유·민주·정의는 그들의 관심사라기보다 기득권 유지와 권력구조―그동안 자신들이 여당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이른바 ‘촛불혁명’이후 적폐라고 규정하는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그 근거가 되어주었던―의 존치 및 보존이 그들의 관심사인 것 같다는 위구심을 버릴 수 없다. 이는 현 정권의 정책을 딴지걸자는 뜻도 있지만, 향후 자신들의 집권 시 전에 했었던 짓을 다시 하고자 할 때 부빌 언덕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불만 내지는 아쉬움일 수도 있다.

극보수정권은 지난 9년여 동안 집권해오면서 집권 세력 중심의 통치 프레임을 굳건히 알차게 건설해 왔다. 권력자 중심, 가진 자 중심, 강자 중심, 남성 중심 심지어는 자국보다 미·일의 이해관계 중심의 정책 운영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책 수립 및 운영에 있어 들이댄 근거와 논리는 언제나 편파적이었고 극단적이었다. 애국/해국(害國), 애국보수/좌빨의 등식에 따라서 모든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할 통치를, 자기들과 자기들을 맹종하며 찬양하는 일부 국민들만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시행했다. 그러나 그나마도 그들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여론몰이 및 조작의 ‘이용’했을 뿐이다. 이들 중 일부는 집권 세력이 원하면, 필요하다면 태극기를 들고 나가 정권을 대신해서,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대신해서 생각과 주장이 다른 상대를 맹공격했다. 맹공격에 따로 근거나 논리는 필요 없었다. 오직 동원인원과 일방적 주장의 힘이었다. 이 맹공격은 권력기반을 뒷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규모나 타당성 등을 떠나 그 영향력은 막강하고 파괴적이었다. 급기야는 사실 여부를 떠나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지고 애국/용공 프레임을 짜기도 했다. 우리가 이른바 이승만·박정희 독재시대에 기승을 부렸던 관제데모의 상시화 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국가가 국민을 위하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 이유이다.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권력이 국민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고(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거짓을 조작하고(위안부 이면합의 등), 거짓을 강요하고(간첩조작 사건 등), 심지어는 거짓을 만들어내는(역사교과서 왜곡 시도), 그리하여 국민들끼리 이간시키는 등의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면, 이런 국가의 존립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정농단에 무력했던 제도는 바꿔야 한다

이 모든 망국적 행위의 밑바닥에는 여러 문제들이 있겠으나, 제도적인 문제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성군 세종과 폭군 연산군의 경우, 우선 서로의 인격과 인간성과 가치관의 차이 등등이 있었을 것인데, 이를 일일이 통제하거나 제재할 방법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나라마다 왕조국가가 아닌 법치국가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오늘날에는 통치자로서의 하자가 있는 지도자를 국민이 알아서 안 뽑으면 좋은데, 그게 또 어디 그렇게 될 문제던가. 돌이켜 보면, 조선이 왕조시대였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왕의 지엄한 명령이 법(경국대전)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세종은 그 법을 선정에 썼고, 연산은 그 법을 폭정에 썼다. 결국 같은 법을 누구는 선용하고, 누구는 악용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폭군이 되기로 작심했다면 모를까, 왕조시대에도 법을 깡그리 무시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고풍상을 거치지만, 결국에 가서는 법과 명분으로 썩고 곪은 곳을 도려냈기 때문이다. 때문에 왕조시대에도 법은 중요했다.

지금의 자유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자 법치주의 국가이다. 따라서 법과 제도는 중요하다. 엉성한 법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또는 문제 있는 법에 근거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할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국민이 피해를 입고 국력이 탕진됐다면, 깊이 잘 들여다보고 시급히 중론과 중지를 모아 개선하거나 보완해야만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조처이다.

그런데 이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무조건 딴지부터 거는 정당이 있다면 이 정당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고자 존재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정적 시각이나 딴지를 거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그러나 입법권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이 이런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 시각, 관점으로 법과 제도를 살펴본다는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민의 입장에서 합리적이고 보편타당한 시각을 가져야 할 터인데, 당리당략을 우선한 이해관계를 가진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점에 있어서는 정부나 여당도 엄중해야 함은 마찬가지이다.

촛불혁명은, 선택을 집권 세력이 하던 시대에서 국민이 하는 시대로 돌려놓은 것이다. 야당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고, 국민은 촛불 정신으로 자유 민주 정의를 사랑하고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잔치에서 한 번 포식을 했다고 해서 앞으로는 먹지 않고 살아갈 도리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다음 끼니를 준비하듯이 되찾은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 중심의 권리를 구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참여와 감시하는, 국민 ‘의무’를 다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정치판을 보면. 자유·민주·정의는커녕 상식 이하의 수준을 맴돌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