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일 오후 대전 서구 타임월드 앞에서 열린 '대전촛불혁명 1주년 대회, 촛불이 꿈꾼 세상을 향해'에서 참가자들이 적폐청산을 촉구하는 팻말과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편집자주]고광률은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이다. 1990년 엔솔로지(아버지의 나라』 실천문학)에 통증으로 등단 이후장편소설 오래된 뿔(은행나무등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잡지사 정치 관련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를 지냈고대중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문예창작 및 미디어 관련 출강을 하고 있다.

이로움 앞에서 의를 생각한다고?

사람이 도덕과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기도 어렵고, 또 그 기준이 모호하여 법을 만들어 살고 있다. 법은 왕조국가시절에도 있었고, 현존하는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법을 만들어 그 법에 따라 산다. 법 위에는 귀신이나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다.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겠다던 전직 대통령이 법을 어겨 법에 따라 탄핵이 되었는데, 그 법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법 또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정작 자신은 그 법으로, 또는 그 법 위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을 ‘단죄’하지 않았는가.

법을 무시하는 전직 대통령과 이를 어쩌지 못하는 나라를 지켜보는 심사가 심란하다. 할 일도 많은데, 불필요한 데 국력이 낭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그는 어떤 힘을 믿고 있으며, 기다리고 있는가.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다.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라는 뜻이다.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말도 있다. 눈앞의 이로움에 의를 저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견리사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도 있다. 이로움 앞에서 의로움을 생각하면 그게 사회주의자라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를 중시하기 때문에 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이념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패권주의 등이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 사회 속에 깊이 침투한 사상이다. 이로 인해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나 각종 시국 사건과 얽혀 억울한 누명을 썼던 자들이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적폐를 없애고자 촛불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견리망의 그리고 지록위마

그러나 거리에 들고 나갔던 촛불을 각자의 집으로 들인 지금, 그 촛불의 요구를 왜곡하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세력들이 점점 더 어둠의 기운을 빨아들여 키워가고 있다. 그들은 여론전을 통해 마치 세상에는 두 개의 정의가 존재하는 양 부르짖다가 이제 그 주장이 먹히지 않으니 정의는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가치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좌충우돌하며 온갖 광대짓을 일삼고 있다. 이 광대들에게 지금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론의 지지이다. 그 여론은 아마도 의보다는 이를 중시하는 자들의 ‘자각’일 것이다.

지록위마. 진나라 환관 조고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는 고사인데, 중요한 것은 사슴을 말이라 우기는 조고가 아니라, 마침내 이를 수증하고 인정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어둠을 빛인 양 우기는 세력의 중심에, 아니 그 정점에 박근혜 전직 대통령이 있다. 그가 어둠을 뭉칠 수 있도록 돕는 정상배들이 아직도 촛불을 어둠이라 주장하고 다닌다.

 자유와 민주를 지켜줄 힘

집에 들인 촛불을 껐는가. 내 집안은 밝을지 모르나, 아직 거리는 어둠으로 식별이 어렵다. 나갈 때, 촛불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니 집안에 들인 촛불을 끄지 말고 밝혀두시라. 그리고 지난겨울 얼결에 촛불을 밝혔다면, 아직 촛불의 의미를 모르겠다면, 공부하시라. 그리고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은 꼭 그 이유를 일러주시라. 어둠이 살아서 우리의 민주와 자유를 여전히 겁박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