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여의도 자유한국당 당사 앞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무죄 석방을 위한 홍준표와 친박 기회주의패 퇴출’ 촉구 8차 태극기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2017.8.22/뉴스1

[편집자주]고광률은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이다. 1990년 엔솔로지(아버지의 나라 실천문학) 통증으로 등단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뿔(은행나무) 등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잡지사 정치 관련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를 지냈고, 대중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문예창작 및 미디어 관련 출강을 하고 있다.

내가 국가에 우선한다

친박 김진태 국회의원(자유한국당)이 국감장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는데 대해서 고맙게 생각들 하셔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탄핵 받은 대통령이 법 절차에 따라 재판받는 것을, 그것도 불성실하게 부인과 부정으로 일관하며 버티고 있는 것을 국민이 왜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나마도 사실상 재판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말짱 헛말이 되고 말았다.

왕조시대에 국가는 곧 종묘사직이었다. 국가가 종묘사직으로부터 나왔고, 왕이 죽어서 또 종묘사직이 될 터이니 왕 자신도 국가인 셈이었다. 오늘날 국가는 국민·영토·주권을 갖춰야 국가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국가는 최고 권력자의 일방적인 명령이나 지시가 아닌 법에 의해 다스려진다. 그래서 법치국가라고 한다.

영화 《사도》를 보면, 사도세자가 자신을 벌주려는 아버지 영조에게 이렇게 대든다. 나를 핍박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대명률에 나옵니까, 경국대전에 나옵니까?

‘왕=법’ 또는 ‘왕〉법’이었던 시대에 아들이 법을 들이대며 아버지에게 대든 말이다. 물론 영화인지라,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조선왕조시대에도 자신이 곧 국가인 왕도 자기 멋대로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말로서 실체를 빚는 친박들

그런데 21세기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법을 어긴 대통령이, 그것도 헌법을 크게 어겨 탄핵을 받은 대통령이 재판정에 나오는 것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라며 ‘일갈’을 하고, 또 사실상 재판을 보이콧하고, 지지자들을 의식한 여론전을 펼쳐도 이를 ‘정당방위’인 양, 정치탄압에 따른 핍박인 양 호도하고 있으니, 한국의 정치가 아주 넓고 깊게 곪고 썩었음을 느낄 수 있다.

해석, 판단, 의미는 최소한 객관적 사실이나 실체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할 터인데, 말로서 사실과 실체를 만들어 이 허깨비를 놓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의미를 끌어 붙이는 형국이 되고 있다. 즉 실체가 무엇인가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중요시 생각하는 시대인 것이다. 실체적 진실과 합리적 의심이 부정되고, 말로서 형상을 만들어 그 형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의미를 다는 것이다. 인과론도 없고, 상황과 맥락도 없다. 오직 세(勢)와 주장만 고성과 욕설 속에서 난분분할 뿐이다.

대통령=교주?

결국 박근혜는 헌법상의 대통령이었던 것이 아니라, 신앙상의 교주였던 셈이다. 교주는 이성과 논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교주는 절대선이기에 인간의 법 따위는 문제되지 않는다. 지금은 교주를 내세워 부귀영화를 누렸던 측근 신도들이 교주의 부활을 바라며, 같은 종단의 배교자들과 이전투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다 같이 합심노력하면 교주의 부활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그리하여 그 교주 밑에서 다시 과거 영달을 되찾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일이 년도 아니고, 지난 십 년간 혹세무민으로 지배해 온 ‘하찮은’ 국민들인데, 보다 오묘한 프레임과 한 차원 높은 교언영색을 개발한다면, 이 난국을 헤쳐 나가 장차 국정주도권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런 자신감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들은 선과 악이 오직 이해관계 속에서 얽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악의 저편에 선이 있지 않고, 선의 저편에 악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는데, 이 선(또는 정의)은 언제나 이해관계 속에서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다. 그 힘의 정점에 정치권력이 있는 것이고.

실체와 사실을 지키자

실체와 사실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나,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지켜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실체와 사실에 대한 은폐와 왜곡 수준을 넘어, 지워버리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봐라.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지 않는가. 누가 지구가 태양을 싸고돈다고 혹세무민 하는가…. 그러니까 너희들은 법 위에 있으나, 잠시 법아래 머물렀던 박근혜 씨에게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정의와 진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사실을 지키고자 발버둥 쳐야 한다니…. 이를 위해 다시 촛불을 들고 찬바람 부는 밤거리로 나와야 한다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실체와 사실이 능욕당하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