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12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중동으로 출국하고 있다. 그 뒤로 이 전 대통령의 구속수사를 촉구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날 "지난 6개월 적폐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개혁이냐, 감정풀이냐, 정치 보복이냐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편집자주]고광률은 소설가이자 문학박사이다. 1990년 엔솔로지(아버지의 나라』 실천문학)에 통증으로 등단 이후장편소설 오래된 뿔(은행나무등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서울에서 잡지사 정치 관련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를 지냈고대중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문예창작 및 미디어 관련 출강을 하고 있다.

[고광률의 다른생각]

통치의 근거는 말이 아닌 실체다

전제군주시대에는 말로써 실체를 만들었다. 말은 실체가 없으니 이 실체는 허깨비인데, 이 허깨비로 통치를 했다. 정의로운 정적을 누명 씌워 죽이고 어진 백성을 기만하고 핍박했다. 이런 시대에는 법은 물론 근본도, 원칙도 없었다. 이치도 순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없으면 판단과 행위의 준거가 없으니 통치가 불가하다. 그래서 허깨비를 실체인 양 둔갑시키기 위한 근거를 만들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 둔갑술에 좌경·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쓰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좌경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수호이다. 원세훈·김관진·남재준·이병기 등등 이명박과 박근혜의 수하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패거리의 이권을 챙기며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은닉하고자 성심껏 짠 프레임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 속에서 위임받은 권력을 오용하여 자유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를, 말 그대로 아무 대책 없이 저질러놓고도 뻔뻔하기 짝이 없다. 잘못이 없으니 배 째라는 식이다. 이른바 똥 싸놓고 그 위에서 뒹구는 격이어서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무척 황당하다. 그 똥을 어서 치워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을 터인데, 그걸 치우지 못하도록 그 위에서 뭉그적거리고 발버둥질을 쳐대며 나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시간만 질질 끌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 될 수 있다는 듯이. 

이명박은 박근혜를 보라

이들이 뭉그적거리며 발버둥질 치고자 워밍업을 하는 근거는 ‘정치보복’이다. 이명박은 12일 출국하며 ‘적폐청산=정치보복’이라고 단호하고 명쾌하게 규정했다. 그러면서 현 정권에 대고 권력은 주어진 것 가운데 80퍼센트만 써야 한다고 충고(협박)까지 했다. 그러니까 나머지 20퍼센트를 쓰지 않고 나라 목숨 붙여 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정말 그렇다면 이명박은 눈물겹게 고마운 대통령이거나, 역대급 멍청한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 남은 20퍼센트의 권력을 안 쓴 것이 아니라, 못 쓴 것이다. 꼼수의 한계 때문이거나, 국민의 반대로 못 쓴 것이다. 4대강은 돈 잔치의 제물로 삼았으나, 세계 경영 성적 1위 인천국제공항을 팔아먹으려다가 실패한 것이 그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정말 재밌는 것은, 재임시절 마이클 셀던의 ‘정의’를 들먹여 개그 기질을 보여준 그가, 공항 출국장에서 ‘상식’을 들먹이는 기습 개그를 했다는 것이다. 댓글 공작 지시를 묻는 기자에게 상식적인 질문을 하라고 성질을 부렸다니, 언어구사능력이 초딩 수준도 못 되는 것같다. 이래저래 검사들 고생이 클 것같다(그러나 어쩌랴. 정확히 말하면 검사들의 자업자득인 것을). 공자 말씀 중에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는데, 딱 그 짝이다.

아무튼 적폐들이 또 실체(사실)를 말로써 뭉개려고 하는 것인데, 박근혜 데자뷰다. 

반성과 용서를 구하라

이명박은 서둘러 박근혜를 학습해야 한다. 모르쇠 또는 동문서답을 할 것이 아니라, 정치보복이라는 박근혜 식의 사악한 프레임을 짜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각종 의혹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던지, 아니면 검사와 국민을 나자빠지게 할, 불세출의 기상천외한 회피 프레임을 짜든지…. 

지금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만든 (실체 없는) 말의 시대가 아니라, 실체의 시대이다. 촛불이 헛된 말들을 불태워, 말 너머에 감춰져 있던 실체를 이미 밝혀낸 지 오래다. 대상과 사물과 상황 없이 정권이 짜 준 가치판단만 횡횡하던 유령의 시대는 갔다. 팩트 없이, 진실 규명 없이 말로써 팩트와 진실을 만들던 시대가 갔다는 것이다. 지난겨울 내내 온 백성이 추위를 견뎌내며 거리로 나와 촛불을 밝힌 이유가 이 때문이다.

이명박은 집권 내내 장차 흩어질 모래를 모아 성을 쌓은 것이다. 그 성 위에 박근혜는 행여 이명박에게 질세라 더 장대한 성을 쌓아올린 것이고. 그동안에는 모래에 묻은 물기가 성의 모양새를 겨우겨우 지탱해 주었으나, 이제 그 물기가 말라 허물어져 내리면서 진실이 밝혀질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공작·조작·은폐·왜곡은 물기와 같은 것이다. 음습한 날, 그 물기는 견딜 수 있으나, 볕이 쨍쨍한 날 그 습기는 견디지를 못한다. 출국장에서 부린 이명박의 성질은 공갈협박인데, 이 공갈협박도 틀림없는 물기다.

지금은 1퍼센트의 권력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라, 99퍼센트의 서민을 위한 나라다. 전에는 1퍼센트의 권력자들이 적폐청산이냐, 정치보복이냐를 가려냈다면, 지금은 그 일을 99퍼센트의 백성들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