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정규직 아나운서와 동일한 업무”…프리랜서 계약 갱신, 정규직 간주
“비정상적 고용형태 지속할 수 없는 시대 흐름”…”KBS “판결 검토해 상고 계획”


방송사 프리랜서 아나운서를 법적 근로자로 인정한 최초의 민사 고등법원 판결이 나왔다. 프리랜서 계약을 명목으로 사람을 쉽게 쓰고 버렸던 방송계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법적 판단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판결은 KBS 강릉·춘천에서 일했던 A아나운서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결과다. 16일 서울고등법원 제1민사부(재판장 전지원)는 원고 패소 판결했던 1심을 취소하고, A씨가 법적인 근로자이며 부당해고를 당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 2015년 10월부터 KBS 강릉방송국에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일하다 아나운서 업무에 투입됐다. 2018년 6월부터는 춘천방송국 요청으로 평일 강릉-주말 춘천 일정을 소화했고, 10월부터는 모든 요일을 춘천에서 일하게 됐다. 2018년 12월엔 춘천방송국과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A씨는 2019년 7월 업무에서 배제됐고, 10월 KBS를 대상으로 근로자지위확인 청구 소송을 냈다. 2020년 11월 1심을 맡은 서울남부지법 제13민사부(재판장 안병욱)는 A씨를 근로자로 볼 수 없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을 했다. 1년3개월만에 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뒤집었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가 파악한 A씨 업무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A씨는 KBS 춘천에서 아나운서들과 단체 대화방 메시지로 뉴스 일정을 조율했고, 주말에도 ‘당직’ 명목으로 뉴스를 진행했다. 뉴스 의상은 사측이 지정한 업체에서 제공 받았고, 의상의 색상 등에 대한 사측 관여가 있었다. 회사 요청이 있을 때마다 A씨는 방송 외의 종무식 사회나 학생 대상 특강, 미디어교육 강사 등도 맡았다. 출·퇴근은 방송시간을 기준으로 이뤄졌고, 휴가 일정은 다른 아나운서 등과 조율했다. A씨는 KBS 로고가 새겨진 명함을 사용했다.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사옥 ⓒKBS
▲서울 영등포구 KBS 본사 사옥 ⓒKBS


1심 재판부의 경우 계약에 업무상 지휘·감독 규정이 없고, A씨의 기본급·고정급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등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근로자가 아니라 판단했다. 근태 관련한 업무 조율은 업무 처리 편의를 위한 것으로 일방적 지시라 보기 어려우며, 프리랜서 진행자들은 책상을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보기도 했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여부는 계약의 형식보다 실질을 따져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참조했다. 기본급·고정급이나 근로소득세 원천징수, 사회보장제도상 근로자 여부 등은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정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지난해 3월 MBC 방송작가들에 대해 중노위, 지난달 KBS전주총국 방송작가에 대해 지노위가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인정했을 때도 적용된 법리다.

재판부는 A씨가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해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A씨는 2015년 11월~2019년 7월 KBS에 의해 배정된 방송편성표와 지휘감독에 따라 정규직 아나운서들과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 당직을 비롯해 직원이 아니라면 수행하지 않을 업무도 상당 부분 수행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A씨가 KBS 프로그램 외에 출연한 사례를 찾기 어렵고, 아나운서들과 일정을 공유하며 차질이 생긴 방송에 투입된 점 등에서도 ‘실질적으로 피고(KBS)에 전속’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신규 인력 채용 또는 프로그램 개편시까지’를 명시한 프리랜서 계약이 반복되더라도 2년이 넘으면 정규직 근로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판단도 이뤄졌다. 재판부는 이에 “피고가 기간만료 사유로 들고 있는 사유는 근로기준법상 정당한 이유에 해당하지 않아 이 사건 해고는 부당해고로서 무효”라고 밝혔다.

A씨를 대리한 류재율 변호사(법무법인 중심)는 “이번 판결은 노동위원회나 행정법원을 통해서가 아니라 민사법원에서 정면으로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근로자성을 다툰 사례이고 상급법원인 서울고등법원에서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프리랜서 계약의 기간에 대해서도 기간제법을 적용해 계약기간이 갱신되어 2년을 도과한 경우 정규직 근로자로 간주한다는 법리를 확인한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류재율 변호사는 “지상파 3사를 비롯한 여러 방송사에서 수십년간 관행적으로 인건비 절감과 해고의 유연화를 목적으로 계약직, 프리랜서, 도급이라는 미명 하에 비전형적인 형태의 근로관계, 불법파견관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해왔다”며 “이번 판결이 방송사의 이런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나아가 방송사 스스로도 방송업계 전반에 걸친 이러한 비정상적인 고용형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시대 흐름을 직시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KBS는 항소심 판결과 관련해 18일 “판결문이 송달되면 판결 취지 등을 상세히 검토한 후 상고할 계획”이라 밝혔다.


출처 :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