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이면 기사 한창 마감하고 있을 때죠, 데스크 독촉 받으면서. 지금은 그게 그리워요."

< 한국일보 > 김민호 기자(26)가 6월16일 오후 6시2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는 지난해 9월20일 한국일보 71기로 입사한 '막내 기자'다. 경제부 부동산팀 소속인 그는 보통 아침에 그날 무슨 기사를 쓸지 발제를 하고, 오전 10시 30분께 데스크의 지시를 받는다.

그의 일상은 6월16일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 일요일 그는 하루 종일 회사가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진 빌딩에 머물러야 했다. 회사가 용역 직원 10여 명을 동원해 15층 편집국을 폐쇄했기 때문이다. "인쇄 공장도, 전산도, 회사가 갖고 있으니 대처할 방법이 별로 없어요. 취재 못한다고 욕을 먹어도 나가서 먹는 게 낫지… 여기(회사 1층 로비)에만 있으니 무기력해요. (취재해야 되는데)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고." 한국일보 막내 기자들은 이날 색종이와 가위, 풀로 '깡패들과 한통속 장재구를 구속하라' '불법찬탈 불법점유 편집국을 돌려놔라'라는 내용의 피켓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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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측에 따르면 토요일인 6월15일 오후 6시20분경 장재구 회장이 박진열 사장, 이진희 부사장, 회장의 지시를 따르는 일부 편집국 간부와 비편집국 사원 등 15명을 대동해 15층 편집국을 점거했다. 사측 인사들은 사진부 당직을 서던 기자 1명과 개인적 용무로 편집국에 들른 경제부장을 편집국 밖으로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15명 정도의 용역직원을 동원했다.

편집국에 있던 기자들에게 사측이 내민 건 '근로제공 확약서'라는 문서다. "본인은 회사의 사규를 준수하고 회사에서 임명한 편집국장(직무대행 포함) 및 부서장의 지휘에 따라 근로를 제공할 것임을 확약합니다.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 퇴거요구 등 회사의 지시에 즉시 따르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라고 사측은 밝혔다. 기자들이 서명을 거부하자 사측은 용역을 동원해 편집국 출입문을 봉쇄하고 비상계단 등 연결통로도 모두 폐쇄했다. 엘리베이터를 수동 조작해 4대 중 1대만 가동시켰다. 사측은 같은 내용의 근로제공 확약서를 기자들 개인 이메일로도 보냈다고 노조 측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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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측은 기사를 작성하고 송고하는 전산시스템인 '집배신'마저도 폐쇄했다. 노조원 비노조원을 막론하고 기자들의 아이디를 모두 삭제한 것이다. 6월15일 기자들이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하면 "퇴사한 사람입니다, 로그인 할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이 문구는 6월16일 "사용자 정보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로 바뀌었다.

6월16일 하루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노조 측에 따르면 정병진 주필, 이준희 논설위원실장을 비롯한 이계성, 황영식, 이충재, 장인철 위원 등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은 오전 회의를 열어 "정상적인 신문 제작을 막는 작금의 상황을 개탄한다"며 "사설 게재를 거부한다"고 사측에 통보했다. 사측은 퇴직한 임철순, 강병태 논설고문 등에게 사설을 요구했으나 고문들 역시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 '아침을 열며'의 고정 필자인 이강윤 시사평론가도 "'정론직필'이라는 언론 본연의 임무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사회의 목탁이자 공기로서의 한국일보 조기 정상화를 촉구한다"라며 한국일보가 정상화될 때까지 칼럼 집필을 거부한다는 뜻을 밝혔다.

사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측은 이날 오후 "회사는 편집국을 폐쇄하지 않았다. 회사의 사규를 준수할 의사가 있는 모든 사원들은 언제든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다만, 근로제공 의사가 없거나 사내 질서를 문란케 하여 신문의 제작을 방해하려는 자에 한해 선별적으로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노조 비대위는 "파업 등 쟁의 행위가 없는 상황에서 '선제적 직장 폐쇄'는 불법이 명확하다. 수많은 판례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노조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현재 부장 7명이 편집국 안에서, 평기자 7명이 편집국 바깥에서 사측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 사측은 이날 오후 인사를 통해 기자들이 투표로 반대 의사를 밝힌 하종오 논설위원을 편집국장 직무대행으로 재임명했다. 사측의 인사발령을 거부해온 편집국 간부 4명에게는 자택 대기발령을 내렸다.

이날 기자들은 1층 로비에서 수차례 집회를 갖고 상황을 공유하며 부서별 발언을 이어갔다. 정상원 노조 비대위원장은 "오늘 오후 서울지방노동청에서 현장조사를 왔다. 조사관이 사측 사람들과 한참 얘기한 뒤 '노동부 공무원 25년 동안 이런 확약서는 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이미 취업규칙에 있는 내용을 무슨 확약서를 받느냐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5월21일에 이어 6월11일 또 다시 해고 통보를 받은 이영성 전 편집국장은 "이 사건의 본질은 회사를 망친 장재구 회장의 비리사건이다. 기자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해 잘 대응하고 있다. 정상원 비대위원장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자"라고 기자들을 격려했다.

한국일보 기자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건 다음날 발행될 '짝퉁 한국일보'에 대한 우려였다. 이영창 기자가 6월17일자 지면 제작 상황을 기자들에게 알리자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니나다를까 6월17일자 한국일보는 24면(보통 32~36면)으로 8면이 줄었다. 1면 오른쪽에는 박진열 사장 명의의 사고가 실렸다. '신문제작 정상화를 위해 오늘자부터 지면 수를 평소보다 줄이는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내용이다. 경제면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원고지 6~8매짜리 기사가 바이라인이 안 달린 상태에서 나갔고, 전국․종합면은 연합뉴스를 '우라까이(베낀다는 뜻의 업계 은어)' 한 상태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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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주 한국일보 비대위 부위원장은 "사측이 용역을 동원해 기자들이 일을 못하게 막은 사례는 언론 통폐합이 있던 80년대에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사원 지위 확인 가처분신청'을 내고 추가적인 고발에 들어가는 등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김민호 기자는 "사측이 우리를 쫓아낸 이유가 '신문 질 하락'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연합 기사로 도배된 신문이 독자들에게 배달되는 건 남부끄러운 일이다. 입사 1년 전 인턴 하던 시절부터 한국일보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옛날 명성을 찾을 수 있게 열심히 싸워가겠다"라고 말했다.

전혜원 기자 / woni@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