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백창현 한국경제 사회부장...정부 청사 원년멤버      

김중규 편집위원 btn_sendmail.gif jkkim56@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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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대전청사 기자실 원년 멤버인 백창현 한국경제 사회부장.

      그는 대전이 또다른 고향이라며 은퇴후에도 오가면서 옛 친구들을 찾겠다고 말했다.

 

“13년 전에 대전왔을 때 개인적으로 상황이 최악이었어요. 저에게 대전은 ‘솟터’나 다름없었죠. 옳은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되니 화병이 나서 3년간 매일 한의원에 다닐 정도였죠.”

정부 대전청사 기자실 터줏대감 백창현 한국경제 부장(54).
지난 1998년 8월에 개청한 정부 대전청사와 동갑내기 언론인이다. 기자실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원년 멤버다. 그의 대전행은 해직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15일 정부대전청사에서 만난 그는 13년 전 회사 상황을 ‘복기’(復碁)하면서 잠시 동안 감회에 젖었다. 특정 학맥의 사내 요직 독식을 견제했다가 되돌아온 반발력에 튕겨져 대전을 와야만 했던 일과 노조위원장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대전에 정착 등으로 그의 근대사는 정리됐다.

“맨 처음 내려왔을 때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죠. 정신적인 고통이 회사 상황과 맞물려 엄청났죠. 다만 유일하게 좋은 것이 있었다면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중앙일간지 기자들의 노동 강도는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새벽 별보고 역시 저녁별과 함께 퇴근해야 하는 게 일상이다. 대전청사는 달랐다. 일거리도 적은데다가 쫓겨난 처지에 의욕도 없었다. 한번은 벌건 대낮에 그는 퇴근을 했다.

“해가 중천에 있는데 퇴근을 하니 불안해 죽겠더라고요. 집에 가다가 다시 사무실로 와서 컴컴할 때까지 빈둥빈둥하다가 갔습니다. 서울에서는 문광부,농림부 등을 출입했는데 그 시간대 퇴근은 상상조차 못하는 일이였죠.”

14년간 서울 생활에 길들어진 생체 리듬이 무조건 반사를 보였다. 당시 한국경제 대전청사 팀은 3명. 팀을 이끌면서 굳이 글을 쓰지 않아도 기사량은 충분했다. 이래저래 놀고먹는 기자가 되었다. 별명이 ‘장당 200만원’이었다. 원고 몇 장 쓰지 않고 월급만 받았다는 비아냥이었다.

“내가 일을 열심히 하면 나를 쫓아낸 사람들이 좋아진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우습지만...그 땐 그랬어요. 회사에 대한 반감이 컸지요. 아무튼 귀양살이 온 충격이 3-4년은 갔죠.”

정부 대전청사 개청 직후 기자실은 곧 유배지였다. 서울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등에서 노조활동을 하던 동료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퇴출시키기는 그렇고 옆에 두기는 더더욱 안 되는 인물만 골라 대전청사 출입기자로 속속 내려 보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자연스러웠다. ‘대전총각’ 멤버들이 할 수 있는 건 극히 한정적이었다. 객수를 달래는 술과 함께 모여서 하는 놀이 뿐이었다.

“반전에는 가족이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2001년도 였죠.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이 대전에 와보고는 ‘너무 좋다’,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합디다. 사실 아이들 교육이 이사에 걸림돌이었는데 당장 아내와 상의를 하고 내려왔습니다. 아이들이 좋다고 하고 저 역시 가족과 함께 하면 일에 대한 의욕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2003년 한차례 서울 본사에서 올라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것도 가족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 서울행은 불가능했다. 본사 요청을 후배를 먼저 보내는 걸로 대신했다.

“대전은 정말 살기가 좋은 곳입니다. 우선 국토 중심부에 있어 각지에서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다보니 배타적이지 못해요. 게다가 인간성 자체가 온순하고 주변 환경 또한 서울에 비할 바가 못 되죠. 정부 청사 공무원들이 이사를 하지 못하는 건 상당부분 교육 탓입니다.”

그는 실천을 통해 교육 문제를 핑계로 만들었다. 두 아들을 경희대 한의대와 성균관 대학을 보냈다. 지방에 내려가면 죽으러 가는 걸로 기피했던 사내 문화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백부장이 샘플이 됐다.

“둔산은 서울 강남에는 못 미치나 전국 최고 수준으로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대전특구 연구원 자녀에다 정부 청사 공무원, 그리고 대전의 하이클래스 자녀들이 하나의 직군을 형성하면서 우수한 교육환경을 자랑하죠. 그 정도면 지방 탓하면서 교육 문제를 들고 나오지 못하죠.”

대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공무원과 언론인들의 이사와 대전 정착으로 표면화됐다. 쫓겨 온 대전에서 그는 보란듯이 정착을 한 그에게 비친 한밭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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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대전청사 기자실에서 한국경제를 읽고 있는 백부장.

 

 “만신창이가 된 사람에게 또 다른 고향을 만들어 주었다고나 할까요. 떠나더라도 잊어서도 안 되고 잊지 못할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처음 두려움과 좌절이 기쁨과 행복으로 승화돼 결과적으로 13년 만에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된 셈이죠.”

백부장은 현재 강원도 화천군정 자문위원이다. 춘천 성수고, 외국어대를 졸업한 그에게 화천은 태어난 고향 춘천에 인접한 곳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로 귀거래사를 대변했다. 다만 정년 후 그곳에 있더라도 대전에 둔 반쪽의 인연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대전은 이제 수도권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촌스런 문화가 있어요. 일종의 패거리 문화죠. 개인의 능력보다 학맥을 먼저 따지는 것이죠. 없어져야 할 폐습입니다. 또, 대전청사가 대전에 내려온 지 13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속감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역민들이 감싸주고 함께 하는 문화행사를 많이 만들어 동질성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백부장과는 약 1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충청도 사람 단점을 얘기할 때는 의기투합도 있었고 대전발전에 고향, 타향이 있을 수 없다는 말도 나눴다. 어쩌면 오는 3월 터줏대감 자리에서 내려와 서울행 KTX를 탈 수도 있다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가부를 분명히 하지 않는 지역성에 불편했다”고 덧붙였다. 공감이 갔다. (연락처)010-4693-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