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사실공표죄 논의는 인권 보호 증진이라는 거역하기 힘든 명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정치성’을 무시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12일 인권의 날을 맞아 법무부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베리타스홀에서 개최한 ‘미디어와 인권’ 국제 심포지엄의 첫 번째 세션 ‘피의사실공표와 미디어’에서 심석태 SBS 국제부 부장(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은 최근 언론계 이슈인 피의사실공표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피의자로 검찰 조사를 받았을 당시 언론은 수사상황과 관련해 무분별한 생중계식 보도로 큰 비판을 받았고, 이는 피의사실공표죄 논란으로 이어졌다. 최근 한국일보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RO 회합 녹취록을 입수해 보도한 것도 마찬가지 논란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법무부는 ‘수사공보제도 개선위원회’를 설치하고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각계 의견을 수렴했다. 이후 2010년 1월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이 제정됐다. 또한 형법 제126조 ‘피의사실공표죄’에 따라 기소 전 피의사실을 공표한 자에 대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규정(수사상황 브리핑 등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우에는 위법성 조각)하고 있다.

 

심 부장은 “한국에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인정, 명예훼손에 대한 형사처벌, 언론중재 제도 등 언론에 대해 매우 다양한 법적 규제가 존재한다”며 “일반적인 공무상 기밀 누설 외에 특별히 피의사실공표에 대해 별도의 형벌 규정을 두고 강하게 처벌하는 사례는 한국 외에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발제자로 참여한 앤드류 트로터 영국 교통경찰청장에 따르면 영국은 ‘레비슨 리포트(Leveson Report)’를 발족하고 피의자와 재판에 관련해 공식적인 브리핑 이외의 비공식적 정보 유출을 예방하고 있었다. 레비슨 리포트의 권고사항에 따라 영국 경찰은 피의자와 재판과 관련해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 발표는 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트로터 청장은 “영국은 오랜 시간 일부 기자와 경찰관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비공식적 접촉이 빈번했다”며 “그러나 성범죄자나 유명인과 관련된 수사의 경우 SNS 등을 통해 해당 피의자의 무차별적인 신상 유출이 이뤄졌다. 이에 영국 경찰은 인권과 공익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국의 레비슨 리포트와 관련 정책은 일종의 윤리강령으로 우리나라의 피의사실공표죄처럼 형사 처벌을 규정하지는 않고 있다.

 

심 부장은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범죄 수사 관련 보도에서 뉴스 수용자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선정적 기사는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면서도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는 피의사실 공표의 경우 대부분 정치적 문제와 관련돼 있다”고 지적했다. 6·25전쟁 직후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피의사실공표죄가 정치적 요인을 가지고 도입됐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더한다.

 

심 부장은 “여야가 동일한 사안에서 피의사실공표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피의사실공표는 순수하게 인권적 문제로 제기되지만 실상은 사안 자체나 처리과정 등에서의 정치적 힘겨루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 진영에 대해서는 비공개를 주장하고 반대 진영은 공개를 요구한다. 피의사실공표가 철저히 정치적이고 상황논리적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피의사실에 대한 보도 자체보다 보도 과정과 방식이 지나치게 감정적인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언론보도가 주로 정치적으로 이해관계가 엇갈린 상황에서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동의를 촉발시킨 면이 있다”는 것이 심 부장의 주장이다.

 

그러나 언론계에서는 피의자의 인권만큼 언론의 자유도 존중돼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심 부장은 “언론자유 지상주의는 아니지만 규제가 능사는 아니다”라며 “언론의 자유도 한 측면에서는 인권이다. 미디어는 가해자, 인권은 피해자라는 대립적 구도는 맞지 않다. 인권이라는 큰 틀에서 어떻게 현명하게 이 둘을 조율할 것인지가 문제다. 언론이 자유를 잃으면 공직사회에대한 감시견 역할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트로터 청장도 “영국 기자들도 레비슨 보고서를 일종의 언론 탄압이라고 생각한다”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언론계와 학계 의견을 수렴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기자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