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조작한 '간첩이 아닌 간첩'


“나는 간첩입니다”라는 자백. 그들의 증거는 늘 그러했다. 그 증거에 의심을 품은 한 해직 언론인의 카메라는 그들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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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백> 포스터

'나는 간첩입니다'라는 카피와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강제로 찍힌 지문 이미지가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최승호 감독의 다큐멘터리영화 <자백>은 국가정보원의 간첩 조작사건을 다루며 국가권력의 어둠을 철저하게 파헤친다. 주요 언론에서도 감히 다루지 못하는 권력의 민낯을 향해 최승호는 저널리즘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결국 그의 끈질긴 취재정신은 재판결과를 뒤집는 결과를 만든다. 김기춘, 원세훈 등 당대 권력의 핵심들이 주연으로 대활약한 이 영화는 국민의 호응으로 제대로 응답할 태세다.


지난 4월 전주국제영화제(JIFF)에 상영될 때 까지만 해도 이 영화가 무사히 관객 앞에 선보일지 염려가 앞섰다. 현 시대에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상황이 후환으로 이어질 거란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최승호 감독조차 “지난 3년 동안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을지, 무슨 일을 할지 몰랐다. 어쨌든 겨우 여기까지 왔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저 마지막 공포의 벽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끝내 자유로울 수 없다”며 끝까지 투지를 발휘했다.


<자백>은 JIFF에서 다큐멘터리상과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의 넷팩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낳는다. 하지만 당초 극장 개봉이 불투명하자, 지난 6월 13일부터 스토리펀딩을 통해 개봉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금 목표는 2억 원. 스토리펀딩 첫날 3000만원이 모금됐으며, 열흘 만에 2억 원을 모두 모았다. 8월 12일 현재 4억 원을 돌파한 모금은 오는 8월 31일까지 진행된다.


‘유우성 간첩사건’ 취재, 국정원 정면으로 겨냥
최승호 감독은 영화 <자백>을 통해 거의 모든 간첩사건들의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재일동포와 간첩이었고, 지금은 탈북자가 간첩으로 지목된다. 지목된 자들은 탈북자 조사기관인 중앙합동신문센터(합신센터)에 최대 6개월간 구금되며 조사를 받는다.


<자백>은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인 유우성 씨가 간첩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는 과정이 중심이다. 유우성 씨는 북한 보위부 지령을 받고 탈북자 정보를 북측에 넘기는 등의 혐의를 받아 구속 기소됐다. 국정원에서 6개월 동안 조사를 받던 유우성 씨의 동생 유가려 씨의 “오빠가 간첩”이라는 자백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유가려 씨는 국정원에서 풀려난 뒤 기자회견에서 허위 자백이라고 밝혔다.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중국 공문서도 조작임이 드러났다. 이 후 유우성 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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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우성 씨의 동생 가려 씨는 “맞는 게 너무 공포스럽고 힘드니까 할 수 없이 허위진술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자백’ 트레일러 캡처)


유우성 씨 말고도 조작된 다른 간첩 사건
<자백>은 유우성 씨 말고도 조작된 다른 간첩 사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탈북자 한 모씨가 대표적이다. 한 씨는 지난 2011년 12월 13일 합신센터에서 사망했다. 당시 국정원은 “탈북자 한 씨가 합신센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간첩이라고 자백한 뒤, 샤워실에서 운동복 끈으로 목을 매 숨졌다”고 발표했다.


한 씨는 공설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혔다. 북한에 남아있는 한 씨의 딸은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있었다. 최승호 감독은 한 씨의 딸에게 전화를 걸어 한 씨의 사망사실을 알리고, 죽은 한 씨의 진짜 이름과 행적을 알아낸 뒤, 결국 간첩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뿐만 아니다. 홍강철 씨는 탈북 브로커 납치를 시도하며 국내외에서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홍 씨 역시 합신센터에서 조사를 받은 끝에 “북한 보위사령부의 지령을 받고 들어온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홍 씨는 변호인단에 “국정원이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다주고 돈과 집, 직장도 주겠다며 약속해서 하위자백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홍 씨 역시 1심과 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영화는 과거로도 거슬러 올라간다. 재일교포 김승효 씨의 현재 모습이 마지막에 나온다. 김 씨는 고문을 당한 뒤 정신을 놓았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있던 시절, 김 씨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의 한 사람으로 지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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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호 감독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공항까지 쫓아 질문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재직 시절 수많은 간첩 사건을 지휘한 당사자들이며 이 후 사건이 무죄로 판명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른다” “사법부의 일이다” “책임 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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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호 감독은 직접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만나지만 경호원의 저지에 밀려나고 만다.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PD수첩’ 간판 PD 최승호의 작품
최승호 감독은 MBC ‘PD수첩’의 간판이었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과 스폰서 검사 사건 등을 다루며 일약 스타PD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2012년 회사 기강 문란의 이유로 해고됐다. 부당해고 소송을 내고 1심과 2심에서 모두 이기고 대법원의 판결만 남았다. 현재 뉴스타파 앵커로 활동 중이며 최근에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성매매 의혹을 보도하기도 했다.


함께 MBC에서 해고된 박성제 기자는 “<자백>이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 이 영화는 최승호의 모든 것이 농축된 영화”라고 평가했다.


멀티플렉스에서 개봉하기 위한 전략 ‘스토리펀딩’
<자백>을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몰린다. 한국 사회에서 성역으로 존재하는 국가정보원의 간첩 조작사건을 다뤘기 때문이다.


예민한 사례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상영을 거부하는 사례도 많다. 세월호 문제를 다룬 <다이빙벨>은 실제 대형 영화관에서 상영과 대관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룬 <또 하나의 가족>은 상영관을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최승호 감독 역시 “개봉관 확보에 걱정이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실제로 걱정들이 많았다”며 “<다이빙벨>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지만 멀티플렉스 스크린에서 연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자백>도 비슷한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라는 게 영화계에 계신 분들의 우려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자백>을 멀티플렉스에서 개봉하기 위한 전략으로 스토리펀딩을 선택했다. 그는 “많이 모이면 전국적으로 영화관을 대관해 시사회를 열 것이다. 국정원을 다뤘다 하더라도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완벽하게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8월 12일 현재 16,005명이 <자백>을 후원했다. 1만원을 후원하면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기재되고, 시사회 티켓 1매를 증정한다. 100만원 이상은 후원자 명의로 <자백>의 특별 시사회 및 최승호 감독과 관객의 대화가 개최된다. 시사회는 9월부터 전국 단위로 열릴 예정이다.


국가권력의 심장부를 겨냥한 최승호의 <자백>은 오는 10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최 감독은 “이 영화를 천 만 명이 본다면 우리나라는 한 단계 정의로워 질 것”이라고 자신했다.